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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회 현장 ]

정통목회와 현존 전도로 성장하는 미래적 교회, 주님의숲교회(광명) 

광명시 소하동에 주님의 숲교회 개척, 

지역아동센터와 작은도서관으로 확장하며 활기찬 목회 모습 보여줘

평신도 예배 사역자 양성과 바른 신앙교육으로 공동체와 실천 봉사 균형

작은 교회 공동체들에게 모범 사례로... 젊은 목회자들에게 용기 줘

교회에 내일이 있는가?

 

교회는 어제의 헌신으로 오늘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오늘 예배자들을 보면서 내일을 소망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교회에 내일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선뜻 긍정적인 답을 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교인은 줄고 있고 특히 아동, 청소년들의 숫자는 급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질문은 “교회에 새로운 구도자들이 있는가?” “교회에 아이들이 예배를 드리는가?”라고 생각된다. 실로 많은 지도자들이 어제의 용사들이 내어놓는 주먹밥으로 만족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이른바, ‘교회의 부흥’을 위해 많은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실행했다. 그러나 교회개척 후 십 여 년 간, 교회성장 프로그램을 한 번도 실시하지 않고 건강한 교회로 성장하는 교회가 있다. 경기도 광명시에 있는 주님의숲교회가 그곳이다.  주님의 숲 교회를 담임하는 박재환 목사는 "22살에 선교단체의 간사로 시작해서 28년간 목회사역을 하면서 교육전도사, 전임전도사, 강도사, 부목사, 담임목사로서의 경험을 통해 교회의 건강한 성장과 부흥이 인간적 활동에 근거하지 않고 기도와 말씀이 정기적이고 지속가능하게 사람들에게 전파되는 정통신앙의 노력에 있음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주님의숲교회는 거룩한 공예배와 개혁주의 설교에 집중하고 성경공부는 오직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서’와 ‘신도게요서’를 가르치고 있다. 이에 성도들은 바른 말씀의 해석과 적용을 통해 흔들림 없는 신앙의 도리를 전인적으로 체득하고 있다. 

아울러 만인제사장설에 근거, 신앙의 주체는 교인 각자이며 믿음과 헌신은 개인의 자발적 신앙고백에서 출발하고 이는 강요되거나 비교되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의 행위가 동반되는 열매를 맺게 된다. 이를 실험하고 실현하기 위해서 예배 중 헌금시간이 없으며 주보 등에 헌금자 명단도 없다. 많은 사역자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교인 대부분은 자신의 힘에 넘치도록 헌신하고 있으며 적은 숫자가 큰 일을 행하고 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일군들이다. 

 

주님의 숲 교회의 특징은 네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평신도 예배 사역자'이다.

3부로 드려지는 예배는 각각의 예배 사역자들이 찬양을 인도하는데 대부분 평신도들이다. 특히 1부 주일학교 중심의 예배는 주일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밴드가 찬양을 인도한다. 예배의 주체가 회중이 되고 이후, 믿음이 성장하며 예배사역의 일군으로 세워지게 된다. 2부 예배는 전통적 예배로 드려지지만 어린이와 청소년도 모두 참여하여 이후, 성인 예배에 괴리감이 없도록 한다. 3부 찬양 예배 역시 목회자가 아닌 평신도 사역자의 찬양인도로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넘치고 있다. 

둘째. 지역 복음의 실천장으로 아동복지 현장인 '숲속지역아동센터'이다.

개척 초기에 시작한 지역의 아동들을 위한 방과후 프로그램이 성공적으로 세워져 아동복지기관인 아동센터를 설립했다. 처음에는 19인 시설로 설치하였으나 13년이 지난 현재, 33인 시설로 지역사회의 복지를 직접적이고도 폭넓게 실천하고 있다. 이 일은 복음전도의 시너지를 일으킨다. 

셋째, 문화선교의 현장인 '포레스트작은도서관'이다.

교회가 예배당과 복지관을 임대해 사용해오던 중 가운데 층에 일반 사무실이 있어서 여러 가지로 불편하고 좋은 않은 일들이 많았다. 교회의 재정이 넉넉하지 못했지만 기도하면서 교회가 건물의 효용성과 문화선교를 위해 도서관을 열기로 작정하고 3층을 임대하여 포레스트작은도서관을 개관했다. 주민들이 수시로 와서 책을 읽고 시민 동아리나 문화운동에 기여하였고 남녀노소의 좋은 문화공간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결국 건물 전체의 4분의 3이 주님의 숲이 사용하는 결과가 되었다. 

넷째, 정통개혁교회의 '정체성'이다.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을 위한 교회의 조화로운 목양사역이 절실한 현실이다. 세상의 유행가가 돌고 도는 것 같이 교회에 새로운 바람을 줄 것 같은 프로그램은 잠시 잠간의 미봉책이고 건강한 교회를 위한 일이 아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바른 신앙고백에 근거한 개혁교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 가장 좋은 예배이며 선교라고 믿는다. 정통개혁교회의 정체성은 성경에 근거하고 흔들림 없는 바른 신앙고백에 근거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바른 신앙고백에 기초한 시대의 요구에 맞는 프로그램과 과감한 리더십으로 작지만 알차고 보람있고, 희망있는 목회의 현장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박재환 목사는 지난해 말에 광명시에서 수여하는 자랑스런 광명인 상을 수상했다. 작은 도서관을 설치 운영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박재환 목사의 교회와 목회 경험은 이 시대의 젊고 작은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목회자들에게 좋은 사례이자, 큰 격려가 될 것이다.  합동투데이 

 

[논단] 온라인 예배, 비대면 예배는 정당한가?

 

박재환 목사

1. 정성구 박사의 “비대면 예배는 예배가 아니다”에 대하여

이것은 신학적 판단이라기보다 개인의 신념으로 보인다. 참된 예배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명백하다. 영과 진리안에서의 예배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온라인 예배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 수 없는 예배의 형태인가하는 것이다. 영과 진리안에서의 예배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앞에 성심으로 나아가는 일체의 찬양과 섬김, 청종의 신앙적 숭배와 존영을 드리는 행위이다.
온라인예배가 예배로 자리하려면 성령안에서 진리안에서의 예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인데 그것이 가능한가가 관건이 된다.

2. 예배의 수단과 형태의 변화, 예배의 정신의 불변

예수님 당시의 예배는 악기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고 시를 낭송하는 찬양의 형태로 노래했을 것이다. 특별한 의복이나 예배의 순서도 없었다. 기독교의 예배는 그 형태가 변화하여 말씀과 성례와 기도를 중심으로 지금의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예배의 정신이다.
그것은 영과 진리안에서 예배하는 것이다. 개혁교회의 예배는 이러한 말씀이 가르치는 중심을 지키는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예배의 외적인 모습은 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판단할 일은 외적인 부분보다는 중심, 예배의 정신이라 하겠다.

3. 온라인 예배를 통하여 성령의 교통이 가능한가?

최근 수 개월간 온라인 예배를 드리면서 몇가지 뚜렷한 경험이 있었다. 예배에 대한 바른 태도를 가지고 자발적 순종에 있었던 교인은 그들의 예배를 향한 열정이 식지 않고 오히려 상황의 변화가 그들을 고무시키는 모습이었다. 온라인 예배에서 설교자들은 함부로 생각없이 설교하는 일을 조심하고 기록, 보존, 재생되는 설교의 결과물 때문에 진중한 모습을 보였다. 온라인예배에서 예배사역자들은 대체로 더욱 준비하고 긴장하고 피드백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그러나 이런 부분들보다 궁극적이고 중요한 근본적인 일들이 있다. 과연 온라인 예배에 성령의 교통하심이 있는가의 문제이다.
성령의 임재와 교통에 대해서는 필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을 믿는 신자의 대면이 따른다. 그러면 집에서 개인용 컴퓨터 모니터를 보고 예배를 드리는 경우에 성령의 교통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우리는 말씀과 찬양, 기도가 어떤 메커니즘으로 인간의 영혼에 감화와 역사를 일으키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3.1. 참된 예배는 장소를 특정할 수 없다.

예배는 어떤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그 장소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주장을 하지만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다.

19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예수님은 그리심산도 아니고 예루살렘과 아니라 그랬다. 즉, 장소의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3.2. 참된 예배는 외적 형태를 특정할 수 없다.

성령은 제한받지 않으시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므로 인간이 가지는 다양한 문화적 형태나 시대적 상황에 제한 받지 않으신다. 그 어떤 건축양식도 예배당으로서의 제한을 받지 않으시고 그 어떤 음악의 장르로도 역시 제한 받지 않으신다. 어떤 특정한 형태를 예배의 유일한 혹은 가장 탁월한 형태로 고착시키는 순간 그러한 결과물이 우상숭배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3.3. 온라인 예배로도 성령의 교통하심이 가능하다.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는 당신의 백성이 고통과 환란의 시대를 맞아 예배당에 출석하지 못하고 이웃의 안녕을 위하여 감염의 기회를 막고자 자신의 집에서 온라인으로 예배하는 것은 성령님의 초월적 능력과 제한받지 않지 않으시는 무소부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신 분앞에 불경한 것도 불성실한 일도 아니다.
뿐만아니라 모니터와 스피커를 통해서 나오는 “소리”가 성령이 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그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그 내용이 전해져서 중생하여 성령이 내재하시는 신자에게 성령의 감화, 감동, 교통하심이 성사되는 것이다. 즉, 온라인 예배로도 성령의 교통하심이 가능하다.

4. 온라인 예배로 진리가 전해질 수 있는가?

사람은 다양한 의미전달의 수단을 가지고 있다. 아주 오래전에는 “말”로만 대화했을 것이고 “문자”의 발견은 말을 기록하고 보관하고 전달하는데 유익하게 되었을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의미를 전달하는 수단이 문자, 전화기, 확성기, 책, 스마트폰 등으로 확대되고 삶의 형태나 소통의 매체도 다원화되었다.
진리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 예수의 현현이다. 예수가 곧 진리이며 이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우리 가운데 빛으로 와 계신다. 온라인 비대면 상태에서 진리가 전해지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온라인으로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과 현장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온라인 예배 역시 현장 대면예배과 같이 진리 안에서 예배할 수 있는 근거가 충분하다.

5. 차선책으로서의 온라인 예배

성심을 다하는 교인으로 온라인 예배를 선호할 자가 누구랴? 하지만 현장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팬데믹의 현실에서 많은 이웃을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고 신자와 불신자의 경계가 없이 경제적으로 위태로움을 양산할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온라인으로라도 예배를 드리겠다는 것은 얼마나 갸륵한 일인가? 일상적인 예배야 당연히 하나님의 앞에 겸비되고 충심을 다하여 준비한 현장예배가 옳지. 이것을 누가 그렇지 않다 말할까? 그러나 현장예배가 천하보다 귀한 한 사람의 삶에 위협이라면 백명이나 천명이라도 그 불편함과 차선책을 선택함을 어찌 정죄할 수 있을까? 온라인 예배는 모이기를 폐하려는 말세적 타락의 영성이라기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차선책으로라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예배의 형태로 보아야 할 것이다.

6. 선한 사마리아인의 결정을 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0:30-37 KRV

종교적 입장에 있었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만난 자들을 그냥 지나쳤다.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예배가 예배일까? 죽어가는 사람을 지나쳐가는 열심이 충성스러운 믿음의 결정일까? 사마리아인처럼은 아니어도 기독교인이 이웃의 위협으로 존재해서야 되겠냐는 것이다. 나아가 이것을 “특정 종교의 핍박”으로 표현하는 일이 상식적이냐는 것이다.

7. 모든 개혁교회 성도에게 고함

우리는 우리 자신과 이웃의 안녕과 거룩한 신앙고백에 따라 비대면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는 것에 대해 스스로나 다른 이들을 정죄하지 않는다. 초월적 하나님의 전능함과 하나님의 박애적 은총이 창궐한 전염병을 피해서 각자의 처소에서 예배드림에 대한 긍휼과 자비를 허락하실 것임을 믿는다. 특히 이것을 정치에 이용하고 권력을 강화하거나 집단의 세력을 키울 목적으로 이웃의 안녕을 저해하고자 성경적 근거도 없이 교인들을 불러 모으는 행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일이 아님을 확신한다. 교인의 안녕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교세와 물질에 연연하는 일부 대형교회의 과격한 선동에는 주님과 주님의 백성들이 바른 신앙으로 판단할 일이다.

​합동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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